전산학도 이야기


검은 마법과 쿠페빵
국내도서>소설
저자 : 모리 에토(Eto Mori)
출판 : 휴먼앤북스 200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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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입으로 말하기 쑥쓰럽지만, 나는 중학교 때 공부를 잘하는 축에 속했다. 도시에 비하면 학년 당 인원도 적고, 별달리 학원을 힘들게 다니던 애들도 드물던 시골의 중학교였지만, 내 나름대로의 공부방식으로 적당히 등수를 유지하면서 지내왔다. 그러나 어느 순간, 나는 변해버렸고, 세상에 나보다 공부잘하고 더 잘난 놈은 수도 없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치만 나는 그 변화의 시점이 어디인지, 그리고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무기력해졌는지는 잘 기억이 안난다. 우연히, 군대에 와서 내 변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실마리를 던져주는 책을 찾았다. 그것도 나와 전혀 유사점이 없어 보이는 70년도쯤에 태어난 일본인 소녀의 이야기로 말이다.
 
   검은 마법과 쿠페빵은 노리코라는 여자아이가 어른이 되가면서 자신의 주변 환경에 동화되고, 그리고 그것을 통해 더 넓은 세상의 모습을 알아가면서 겪게 되는 에피소드를 엮은 책이다. 에피소드들은 주로 우리가 가장 많이 겪는 갈등인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 그리고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나는 이렇게 과거의 어린 자신이 되어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소설들을 본 기억이 많다. 박완서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공지영의 '봉순이 언니', 위기철의 '아홉살 인생' 등 말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런 우리나라의 전후 풍경과 급속한 산업화 시절과는 다른, 그저 평범한 일본 여자아이의 성장기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전자의 책들과는 조금 달랐다. 오히려 일본인 작가가 '검은 마법과 쿠페빵' 에서 그려내는 풍경은 1990년대에 태어나 자란 우리 나이 대 또래들의 성장과정을 좀 더 잘 보여주는 것 같았다. 그도 그럴것이, 내 나이 또래 친구들은 배급받은 옥수수 빵이나 어린 동생들을 돌보느라 학교를 못 간 소녀가장, 달동네에 사는 어린 아이보단 아파트에 살고 적당한 소도시에 살며, 서울·부산 등등에 있는 놀이동산과 커다란 백화점들에 동경을 품고 자라왔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나는 '검은 마법과 쿠페빵'이 여자아이의 성장기를 다루고 있지만, 남자인 나의 성장기와 비교해도 많은 공감이 되었다.

   특히 이 책은 친구의 생일 파티, 불량 청소년들과의 만남, 아르바이트, 사랑 등 일상생활에서 접할 법한 일들로 주인공인 '노리코'의 가치관과 노리코의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어떻게 달라졌는가에 대해서 섬세하게 쓰고 있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지만, 책의 전반적인 내용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얘기를 위주로 살펴봐야겠다.

  '검은 마법과 쿠페빵',. 책 제목이기도 한 에피소드는 노리코의 초등학교 5학년 담임이었던 후카자와 사요코에 대한 이야기이다. 후카자와 사요코는 성적에 따라 제자들을 편애하는 습성이 있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들에게는 급식으로 나온 푸석푸석한 쿠페빵을 노릇노릇하게 구워주고, 성적이 떨어지는 학생은 일말의 동정심도 없이 내쳐버린다. 그리고 성적이 부진한 학생에게는 '절대학습'이라고 하는 연습장 채우기(깜지)를 시키고 수업시간엔 온갖 괴상한 병 이야기를 해대면서 학생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그래서 노리코와 반 아이들은 사요코의 행동을 '검은 마법' 이라고 하며 보지도, 걸리지도 않은 괴상한 병들을 공포스러워 했다. 그런 아이들의 상상력과 상대가 어른이라는 점이 더해져 노리코와 반 아이들은 후지카와 사요코 선생님이라는 존재에게 절대적인 공포감과 어떤 숭배감 같은걸 지니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도 어렸을 때는 왠지 그런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었다. 물론 머리가 커가면서 우리도 어느 순간부터는 단체로 선생님들에게 장난을 치기도 하고, 수업 준비물을 알면서도 일부러 안가져오는 등, 선생님이라는 권위에 대한 우리들만의 도전(?)을 하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소설에 나오는 노리코와 반 친구들의 방식은 그것보다는 훨씬 신사적이고 어른스러웠다. 노리코의 친구 토리는 후지카와 사요코가 이른바 '검은 마법'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스스로가 '검은 마법'을 만들어 내는것이라고 말하고, 후지카와 사요코를 그저 병 얘기를 좋아하는 아줌마일 뿐이라고 설득한다. 그리고 쿠페빵을 구워주는 스토브에 냄새나는 젖은 양말을 말리는 것을 봤다고 말하며 '쿠페 빵'이 주는 '선생님의 총애'라는 상징적인 가치를 한 순간에 없애 버린다. 이 두가지를 통해 후지카와 사요코의 이미지는 '교실안의 신'이라는 이미지에서 '우리집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줌마'로 바뀌게 된다. 아마도 작가는 노리코가 갖고 있던 후지카와 사요코의 이미지와 그 변화처럼 우리가 살아가면서 늘 당연하게 생각해왔던 것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우리 인생의 전환점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맥락에서 살펴볼 때, 내 인생의 전환점은 과학고의 존재와 그곳으로의 진학의 어려움을 알게 된 시점이었다. 나는 중학교 시절, 나를 가르쳐주셨던 수학선생님으로부터 과학고의 존재와 과학고를 가기 위한 스터디 그룹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 수학선생님은 내게 과학고 입시 자료라며 엄청나게 많은 수학 문제를 주시곤 하셨다. 그렇지만 수학선생님은 그 문제들이 내겐 너무 거대한 벽이었다는 걸 모르셨을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나름 시골의 중학교에서 어느정도 수학, 그 외에도 여러 과목에 자신이 있던 편이라, 나 역시 과학고에 쉽게 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렇지만 생전 처음 보는 수학 문제와 가공할 난이도는 나를 굉장하리만치 자극했고, 내가 공부를 잘 하는 편이라는 잘못된(?)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었다. 내 또래 아이들이 풀 수 있는 문제를 나는 풀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한 자극과 내 문제풀이 능력에 대한 인식 변화, 그리고 그에 따른 나의 노력은 그저 지나쳐버릴 수 있었던 많은 사건중 하나를 내 인생의 전환점으로 만들어 주었다.
  
   작가는 이 소설을 쓸 때 왜 하필 쿠페빵이라는, 어쩌면 그 누구도 신경쓰지 않았을 법한 급식용 빵으로 후지카와 사요코의 이미지를 만들었을까? 그건 남들이 지나치고, 무시했을 법한 사소한 지식 또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 누군가에겐 인생의 전환점으로 이용될 수 있음을 보여주기 위함이 아닐까? 내가 과학고라는 존재를 알게 되고, 거기에는 내가 보지도, 듣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문제들을 풀어내는 놈들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처럼 말이다.

  작중에서 노리코는 후카자와 사요코를 피해 동면중인 토리에게 '검은 마법'을 물리쳐 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열한살의 에너지는 열한살에 전부 써야 가치있게 빛난다는 말을 한다. 그건 지금 이 순간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지금 써야할 에너지를 아낀다면 내 인생의 전환점을 그만큼 놓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지금 이 순간의 에너지는 지금 이 순간 써야 가치있게 빛나리라.

검은 마법과 쿠페빵
국내도서>소설
저자 : 모리 에토(Eto Mori)
출판 : 휴먼앤북스 200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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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에서 쓴 독후감인데, 언제 쓴건지 기억이 안난다....

왤케 오그라들징
Posted by 위디안